‘하나님의 진노와 예수님의 고통’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하고 기도하셨는데 세 차례(마 26:39-44) 같은 내용을 반복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사형할 때 독이 든 잔이 주어졌듯이 고대에서는 잔이 사형 집행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잔은 일반적인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사법상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기도에서 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자신의 사법상의 죽음 즉 십자가 처형이 임박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 잔은 인간의 악행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사법적 진노를 의미합니다(겔 23, 사 51).  예수님이 이 잔을 언급하신 것은 자신이 온 인류의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셨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사법적 진노를 대신 받아야 했음을 확실히 아셨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법적 진노는 이튿날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부어졌고 예수님은 이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실 때의 장면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셨다”(마 26:37)는 표현과 세 번이나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기도와 십자가상에서의 부르짖음은 ‘예수님이 죽음이 두려워 몸부림치시지 않았는가?’하는 의문입니다.  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자 밥이 되면서도 찬송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화형을 당하면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고 오히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주체이신 예수님이 이들과 다르게 죽음에 반응하셨다니요?!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자체를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누구도 예수님과 같은 죽음에 직면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온 인류의 악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사법적 진노가 그에게 임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우주적인 무게로 예수님에게 임할 때 그의 내면과 영혼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일시적이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고 그로부터 완전히 단절되는 뼈를 깎는듯한 심통이 예수님을 엄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를 맛보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할렐루야! -이명교 목사

‘어느 시한부 종말론 교주의 최후’

예전에 시한부 종말론자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그 이단의 교주가 자신의 신도들에게 특정한 날짜에 휴거가 일어나고 다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이기 때문에, 재산을 다 팔아서 바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짜가 다가와도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휴거가 일어나지 않자, 신도들은 살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일부 신도들은 재산을 다 팔아서 이단 교주에게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도들이 교주를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법적으로 처벌을 하자니 애매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들이 믿는 신념은 상식에 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독교도 예수님이 동정녀 잉태를 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는 그 믿음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의 가치인 것입니다. 비록,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믿음이 허황되어 보이지만 이것을 섣불리 법의 잣대로 종교를 재단하기는 주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교주는 사기죄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 사기의 근거는 교주에게 자신이 선포한 휴거 날짜 이후의 날짜로 만기가 되는 적금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의 종교적 신념 자체는 법으로 재단할 수 없었지만, 그 교주 자신이 휴거일 이후 날짜로 만기가 있는 적금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 교주의 시한부 종말론의 믿음이 가짜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짜 신념을 통해서 사기를 치고 돈을 갈취했다고 본 것입니다. 결국 그 교주의 믿음에 신실성(sincerity)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우리도 일반 상식을 넘어서는 여러 가지 신념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래서 논리와 상식으로 다 증명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믿는 그 믿음에 우리 자신이 신실하게 살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이 가짜가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 2:17   -이상보 목사

‘삶의 위기는 기도할 때’

1000만 수도 서울을 이끌던 박원순 시장이 10일 새벽(한국시간)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은 큰 충격입니다.  박 시장은 전 여비서에게 성폭력 피소 후 9일 아침 공관을 나가 연락두절된 지 13시간만에 북악산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특별히 여성인권과 시민운동의 개척자로, 그리고 9년간의 최장수 서울시장으로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지만 그는 스스로 불명예스럽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공인으로서의 공과는 공정하게 평가해야겠지만 미화하기 어려운 생의 마침임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인권 중 가장 중요한 인권은 한사람의 생명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권운동으로 전 생애를 보낸 분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인권인 생명을 스스로 끊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을뿐 만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국가 중의 하나임을 우리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정부 통계에 의하면 2018년 자살한 사람은 13,670 명으로 10만명당 26.6 명이 자살했습니다.  하루에 37.5 명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끊은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자살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자살을 하게 하는 상황은 안타까운 일이나 자살은 살인이며 어떠한 자살이든 잘못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면서 자살을 했다면 그 사람의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인생을 살면서 자신으로 인한 것이든 타인으로 인한 것이든 외부의 환경으로 인한 것이든 재난과 역경과 고난을 경험합니다.  숨 쉬기 어려울 정도로 위 아래와 사방의 벽이 꽉 막혀버린듯한 슬픔, 고통, 좌절, 회의가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내 자신에 위해를 가함으로 도피하지 말고 자비로우시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놈의 반란으로 신도 신지 못하고 도망을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작시한 시편 22편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십니다”(1-2절)라고 하며 탄식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왕권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삶의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탄식을 하든, 울부짓든, 땅을 내리치든, 묵상을 하든 기도해야 합니다.  삶의 위기가 너무 커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주여! 주여!’ 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체가 기도입니다. 삶의 위기는 기도할 때입니다. -이명교 목사

‘모든 인간은 죄인: 인지조화의 삶’

종교학과에 다니던 시절, 기독교인이 아닌 다른 과 선배가 기독교는 인간에 대해서 지나치게 비관적 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몽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라고 고백했고, 칼빈은 인간의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를 주장했으니 그 과 선배의 말이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죄인으로 바라보고 인식하는 성경의 관점이 다른 한편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마치 인간들이 자신들이 죄인이 아닌 것처럼 위선을 떨 필요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에게 비교적 신실했던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 속에도 인간적인 연약함과 부족함과 죄스러움이 있었음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성경 기자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의 합한 자라고 가장 후한 평가를 받지만, 성경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다윗의 그 모든 범죄 행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선언은 지극히 정직하고 현실적인 인식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성경의 진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은 인지조화로운 삶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인간이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선언은 자포자기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크리스천들은 이제 더 이상 위선적인 삶을 살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실제적인 인간 실존의 밑바닥을 처절하게 인식하는 정직하고 현실적인 인식 가운데 인지조화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리는 삶일 것입니다. 어찌보면 성경적인 관점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은 예수 없이 자신이 죄인이 아닌 것처럼 포장하며 살아가려는, 인지부조화의 삶을 사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모든 죄인된 인간들에게 오신 예수는 그래서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이상보 목사

‘Sanctification as Evidence of Salvation’

Since the Reformation, Protestants have stressed the distinction between justification, being declared or made righteous before God, and sanctification, becoming holy like God through good works and character.  This distinction is important because it emphasizes how salvation can be by grace alone and through faith alone as opposed to by works (Eph. 2:8-9). 

Still, it is a mistake to downgrade the importance of sanctification, as if it is an optional add-on.  Christians are commanded to obey God and live according to the Bible’s teachings as a direct and inevitable result of Christ’s justifying work in our lives.  This does not mean that Christians can be perfect or will not struggle with sin, but it does mean that a positive trajectory towards holiness should eventually be apparent.  These works do not serve as the basis of salvation, but they do provide evidence of salvation.

1 John 2:3-6 states, “By this we know that we have come to know Him, if we keep His commandments. The one who says, ‘I have come to know Him,’ and does not keep His commandments, is a liar, and the truth is not in him; but whoever keeps His word, in him the love of God has truly been perfected. By this we know that we are in Him: the one who says he abides in Him ought himself to walk in the same manner as He walked.” If one is saved and truly knows and loves God, he will obey his commands.  Insofar as someone does not obey God in any noticeable way, that is a good indication that he is not saved.

Granted, we should be very careful about judging others in this manner because people will have lows in their faith and struggle.  We should be very wise and cautious and not make hasty conclusions, and normally we need to have prolong interaction with a person and knowledge of his life to make such a judgment.  That said, we would be wise to take such warnings from Scripture seriously and not brush off sanctification as if it is not that important.  If we truly love God, we would want to please him with our obedience. –EM Pastor Isak Lee

‘아버지 날을 앞두고’

여러 해 전 아버지 날에 브라이언 버튼이라는 사람이 ‘금년의 아버지 날은 다릅니다’ 라는 제목의 글을 달라스모닝 뉴스에 기고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치과의사였고, 장엄하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목소리의 소유자였으며, 교회의  찬양 리더였습니다.  아버지 날에는 교회 예배 후 집에서 항상 가족과 함께 만찬을 한 후 식탁에 둘러앉아 유쾌한 대화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금년은 다르다”고 브라이언은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아버지가 잘 알려지지 않은 루이소체 치매(Lewy body dementia) 라는 병에 걸려 건강이 크게 쇠퇴하였기 때문입니다.  알츠하이머 치매보다 더 공격적인 이 치매는 아버지가 환영에 빠지게 하고 아버지의 언어구사 능력을 급격히 저하시켰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아버지의 정신은 쇠퇴하였습니다.  침착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친절하고, 정직하고, 지혜로우셨던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젊잖은 의사’(Dr. Burton, the gentle dentist)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집 안을 느릿느릿 어색하게 걸어다니는 환자가 되셨습니다.

브라이언은 “금년에는 아버지 날을 다르게 지내겠다’고 합니다.  자랑스런 마음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아버지의 장엄한 목소리를 기억하며 찬송을 아버지 몫까지 아주 크게 부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정성을 다하여 보살피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어떻게든지 신성한(sacred) 관계로 어어가겠다고 다짐합니다. 일주일 후면 아버지 날입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늙습니다.  늠름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연약한 노인이 됩니다.  병이 들 수 있습니다.  모두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어떻게든지 신성한 관계로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부모 공경(엡 6:2)은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명교 목사

‘The Kingdom That is Not of This World’

This year has seemed to be one of upheaval.  The coronavirus made the world screech to a halt and claimed many lives, and we’ve now seen rioting in major cities due to people’s outrage over police brutality.  We’re looking at some of the lowest confidence in our institutions than we’ve seen in years: Political institutions are failing at justice, protection, and leadership.  As that happens, people are turning on each other, looking at others with different skin color, socioeconomic status, and political alignment as the enemy.  As I look around at what is happening, it just strikes me how steeped in sin humanity is.  We may make some improvements, but it’s an uphill battle and one that we will never win on our own.  There’s a futility to the kingdoms of the world that is impossible to shake. 

This is why Jesus’ words to Pontius Pilate are so important.  In John 18:36, Jesus told him, “My kingdom is not of this world. If My kingdom were of this world, then My servants would be fighting so that I would not be handed over to the Jews; but as it is, My kingdom is not of this realm.”  Jesus’ message was clear: He was not concerned about fighting for worldly power because that wasn’t going to solve anything.  Instead, he let himself be arrested, tried unfairly, and executed because his kingdom is categorically different.  It’s a kingdom that does not fail, that is not built on the blood of enemies but on the blood of the Savior King, and that is not subject to broken patterns of the world.  This is the kingdom that all who have faith in Christ belong to before one is a citizen of any country.

This doesn’t mean we don’t try to enact God’s commands right now, but it does mean we look ahead to what is promised by Christ.  Everything else will fall short, so we should not get caught up in power squabbles.  That might make our journey lonely sometimes as all sides take potshots at us for being different, but Jesus also said that the world would hate his disciples.  However, Jesus himself will never abandon us or let his church dissolve.

I don’t put hope in government, a political figure, or a movement.  Those things come and go, beset with great flaws.  But God’s kingdom?  It will be eternal, and the king will be perfect and just.  That’s the one I’m looking forward to, and the one that gives me hope in times like this. -Isak Lee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요즘 한국 여자골프 선수들의 기세가 등등합니다. 세계 랭킹 1, 2, 3위를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이 차지했다는 보도가 작년에 있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번 대선에서 한국 여자골프 선수들이 실력이 좋다고 언급했을 정도입니다.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이 세계적인 무대를 누비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혹자는 그것을 1998년 이후의 일로 보기도 합니다. 1998년에는 IMF 구제 금융으로 온 국민이 의기소침 했을 때입니다.  그 당시에, 박세리 선수가 골프 대회에서 물에 빠진 골프공을 양말을 벗고 치면서 우승한 그 모습을 보고, 한국의 여자 골프 꿈나무들이 자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어떤 제도, 어떤 원칙이나 법칙, 아니면 어마어마한 지식이 아닌 한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예수쟁이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여기고 헌신하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불교에도 부처가 있지만, 불교도들은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의 깨달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유교에도 공자, 맹자가 있지만, 유학자 누구도 공자나 맹자를 구세주라고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하나님은 가장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신 것도 아니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고상한 지식만을 내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100% 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방법이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진리는 삼라만상을 꿰뚫는 고상한 지식이나 원칙이 아니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시콜콜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따르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이면서도 신비로운 하나님식 구원의 길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 이상보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편견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사회운동은 2012년 플로리다에서 흑인인 트레이본 마틴(Trayvon Martin)이 한 자경단원에 의해 살해되었으나 이 살해자가 무죄로 풀려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흑인에 대한 정부와 경찰의 공권력 남용에 대한 저항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년 5월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에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라는 흑인 남성이 백인 경찰관의 무릎에 눌려 질식사하면서 이 운동은 들불과 같이 미국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편견에 의한 각종 차별이 국가, 사회, 직당, 개인에게서 발견됩니다. 노인학 과목을 택할 때 교수가 ‘Driving Mrs. Daisy’ 라는 영화를 보고 분석하여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 준적이 있습니다.  1989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부유한 유대인 미망인 Daisy Werthan이 그녀의 운전기사 Hoke Colburn 에 대한 여러 편견을 극복하고 신뢰와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인종차별이 사회 깊숙히 만연되어 있던 1948년, 인조차별의 대명사인 KKK 단의 본고장 Georgia Atlanta 에서 시작합니다.

자존심 강하고 깐깐하며 고집 센 Daisy 는 흑인이며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운전기사 Hoke 를 편견을 가지고 차갑게 취급합니다.  그러나 Hoke 는 항상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Daisy 를 대하며 25년 간 그녀의 운전기사로 일합니다.  시간이 지나며 Daisy 는 그녀의 편견을 서서히 내려놓으며 Hoke 와의 우정과 신뢰를 쌓아갑니다.  Hoke 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책을 선물로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서 이제 Hoke도 나이가 너무들어 운전기사일을 그만두게되었고, Daisy는 양로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같이 늙어가는 두 사람의  우정은 계속 이어지게되고. 어느날 Hoke 는 양로원으로 Daisy 를 방문합니다.  Daisy 는 반갑게 Hoke 에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합니다.  “You’re my best friend!”

Daisy 가 인종적 편견을 내려놓는 결정적 계기는 아마도 유대인인 그녀 자신도 편견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사건을 겪으면서일 것입니다.  한 안식일날 그녀가 예배하러 유대인 회당에 가는 도중 차가 길게 막혀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전날 밤 회당이 유대인에게 인종적 편견을 가진 자들에 의해 방화되어 경찰이 도로를 차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에게서 모든 족속을 만드시고 온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셔서 이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인종, 성, 계급, 단체, 교육, 종교 등 모든 것들을 초월한 모든 이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인종, 성, 계급, 교육, 빈부, 종교와 관계없이 평등한 가치와 존엄성을 가집니다.  존중과 정의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집니다. 

편견은 사회갈등, 교회갈등, 가정갈등의 주요 요인 중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각종 편견과 차별하는 생각을 몰아내야겠습니다.- 이명교 목사

‘신앙생활의 개인주의 위험성’

현대교인의 문제점 중 하나는 신앙생활의 개인주의 성향입니다.  혼자서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신앙의 성숙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교인들이 교회 안에 많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려면 복음의 진리를 믿고, 그 믿음을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개인중심의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주의에 빠진 교인은 복음 안에서 하나의 백성을 창조해나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단지 개개인에게 개인적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을 통해 그가 하나의 백성을 창조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해 하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주의에 젖은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도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그 은사를 주신 목적은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방언을 하면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고 방언하지 못하면 성령이 충만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교인은 자기 중심적임으로 자기가 받은 은사에 기뻐하나 공동체가 하나되는 일에 그 은사를 은혜롭게 사용하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성숙을 하나님과의 관계만으로 한정시키고, 은사 자체를 신앙성숙 기준으로 여김으로  신앙성숙을 위한 기도와 노력은 게을리 하게 됩니다.  이들은 오히려 공동체의 하나됨을 방해하게 됩니다.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총장인 Albert Mohler Jr. 은 “개인주의는 교회는 물론, 복음을 저버리는 결과를 낳는다”고 그 위험성을 경고하였습니다. -이명교 목사